올림픽이 열렸던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참가한 대단위 순결 서약식이 거행된 바 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린 이 서약식에는 미국과 그리스를 비롯해 전 세계 젊은이 수천명이 참석해 그동안 순결 서약 카드를 제출한 20여개국 46만여명을 위한 중보기도 시간도 가졌다고 한다. 올해 창립 12주년을 맞이한 순결 캠페인은 미국내에서만 400여만명의 젊은이들로부터 순결 서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선 현재까지 10대 남성 청소년의 약 12%, 여성의 18%가 서약했다고 한다.
10대들의 혼전 순결 서약이 실제로 상당한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미국 컬럼비아대 피터 베어만(Peter Bearman) 교수와 예일대 한나 브뤼크너(Hannah Brueckner) 박사가 ‘미국 사회학 저널’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순결 서약을 한 10대의 성 경험 시기는 일반적인 세대보다 평균 1년 6개월 늦추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또 순결을 서약한 10대는 절반 가량이 20세까지 순결을 지킨 반면, 다른 10대는 이미 17세 때 50%가 성 경험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미국에는 67%의 젊은이들이 혼전 성경험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최근에 튀는 제목에 이끌려 <맛있는 섹스>라는 영화를 감상했다. 흥미 차원에서 슬며시 들쳐본 이 섹스 영화를 통해 본국 성문화의 단면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소리나는 섹스가 사랑의 맛을 높이는 귀중한 역할을 담당하는 매체인 것을 알려주는 영화인 듯 싶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청각을 통한 또하나의 성체계(性體系)를 열었다는 점에서 '소리의 섹스'를 깨우치게 하는 작품이다. 음향 효과에 독특한 역량을 과시해 영상의 질감을 높였다. 듣고 느끼며 몸으로 말하는 사랑의 육각수(六角水)를 보여준 셈이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짙은 접촉음이 우리의 주변에 살아있음에 놀란다.
폐쇄적인 유교문화에 젖었던 양반시대의 감춰진 성생활은 분명 청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버선발의 하얀 속살만 보여도 치부를 드러낸다 하였던 당시의 윤리 강령이 침실에까지 잠입해 남성위주의 연출에 따른 섹스 전횡(專橫)을 부르는 간판의 역할을 했을 터이다.
하물며 방음장치가 허술했던 재래의 가옥 구조를 떠올리면 억제된 감정 표출의 규율에 갇혔을 여성들에게는 답답한 숨만 몰아 쉬는 재갈의 밤이었겠다. 일상에서 며느리의 역할이 엄격히 규제받고 잠자리까지 입막음으로 조용히 해치워야 했던 선조 여성들의 고초(苦楚)에 경의를 표한다.
성생활은 강한 자기 발현(發顯)이자 극단의 사랑 표현이며 합일(合一)을 향한 무한한 전진 작업이다. 끝간데 없는 자기 사랑을 바치는 카니발(Carnival)이다. 사육제(謝肉祭)로써 뜨거운 몸을 던지고 더없는 사랑을 섹스안에 산화(散華)시키는 제전인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승화 행사에 따르는 어떠한 괴성이나 아우성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성문화를 성숙시켰다. 북한산 정상에 올랐으니 소리는 지를 법도 하다. 최근에 성 네비게이션(Navigation) 장소로 뜬 옥탑방의 묘미도 독립된 가옥구조에 기인한다.
낯선 몸에 살을 묻고 저지르는 도발적 접촉을 통해 관객은 봉만대 감독의 저돌적인 실험정신을 엿본다. 몸으로 먼저 시작하는 사랑. 물감색 화면위에 펼쳐지는 대사의 신선한 도발이 돋보인다. 속도감을 좇는 영상의 부드러운 흐름도 끈끈하다. 청각이 시각으로 전환되는 반전(反轉)이 새롭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우려는 맛있는 사랑을 향해 직접 섹스로 돌진하는 동기(김성수)의 무절제에서 비롯된다. 합당한 절차없이 무단 진입한 "원 나이트 스탠드(One Night Stand:첫번 만남에서 성교까지 골인)" 사랑의 추이가 궁금하다. 궁극적 보상은 애정의 검증에 의해 확연히 드러난다. 채울 수 없는 균열이 서서히 찾아들게 된다. 낯선 자극에 빠진 신아(김서형)는 방황을 시작하는데... 달콤한 맛에 현혹된 동기는 그러나 사랑의 집중력을 잃고 만다.
담백하고 정갈한 대사의 극치는 마지막에 힘을 발한다. 3개월만에 나타난 동기가 "너를 갖고 싶어"라고 말하자 신아는 반사적으로 내뱉는다 "너도 나같은 애구나" 전반부에서 이끌던 동기의 남성 우위의 판도는 후반에 발휘한 신아의 절도(節度)에 밀리고 만다. 최후에는 몸으로 말하기를 거부하고 마는 여성의 현란한 판정승이다.
섹스의 명제를 인류가 부여받은 근거는 박애 정신에 기초한 종족의 번식에 있다. 고상한 표현을 빌자면 가정의 창출을 위해 사랑하는 이에게 허락되도록 성도구는 조물(造物)되었으며 생식의 게으름을 방지하고자 빵에 꿀을 바르듯 쾌락이라는 기능을 교접(交接) 행위에 부여했을 뿐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듯 그렇게 먹고 먹히는 것이 자제하지 못한 인간 타락의 표본이며 그 대가로 목구멍에 걸린 씨앗은 뗄 수 없는 목젖의 흔적으로 남았다. 잘못 길들여진 혀끝은 담백하고 신선한 음식을 거부하며 풋과일의 상큼한 맛을 읽어내지 못한다.
진정한 맛은 빵의 속살에 있다. 대화로서 신뢰가 깊어지고 상호 교감(交感)에 의해 애정의 공통 분모는 넓혀진다. 서로의 세심한 이해와 배려속에 사랑 나무가 크며 햇빛을 가릴만큼 잎이 성장했을 때, 마음으로 더 이상 갈 곳 없는 높이에 이르렀을 때, 그만큼 높은 곳에서 두 몸이 만날 때 고귀한 성의식은 작열(灼熱)하는 것이다. 타서 없어져도 좋을 만큼 간절한 높이에서 섹스의 깃발은 도도하게 휘날린다.
일차적인 정신적 사랑의 완성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반복되는 갈증의 해소를 위해 상대의 육체가 그리운 것은 신체의 섭리에 발본(拔本)한다. 그 것이 올바른 몸가짐에서 발동되는 성욕의 맑은 샘물인 것이다. 이내 멀어지고 헤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기능을 섹스는 지니고 있으며 그 해갈의 드라이브가 사랑의 완성으로 가려는 소리있는 아우성인 것이다.
정상적인 사랑의 절차없이 섹스에 무임승차한 자의 결말은 처참하다. 쾌락주의에 대한 집착은 진정한 사랑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사랑의 올바른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칙만을 꿈꾸다 좌절하고 마는 헝클어진 자화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의 고통은 헤어지고 분열된 내장의 주검으로 시냇물에 떠간다.
섹스는 괜찮지만 원나이트 스탠드는 수용할 수 없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용서하기 힘든 여자의 과거가 있다고 답한 57%의 남성 중 ‘과거 남자와의 꾸준한 섹스’를 용서하기 힘들다는 남자는 14%에 그친 반면 ‘과거의 원나이트 스탠드’를 대표 타깃으로 꼽은 남자는 58%에 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 남자와의 수백 번의 섹스는 이해해도, 한번씩이라도 여러 남자와의 섹스는 용서할 수 없다는 편견이다.
맛있는 사랑도 좋고 소리나는 섹스는 현대인에게 더욱 짜릿해서 좋겠다. 질퍽한 베드신과 누드 헤어도 볼만하겠다. 그것이 한편의 영화로서 기술적 값어치를 지닐 수는 있겠으나 잘 못 조명된 스팟 라이트에 눈 먼 청소년들이 덤빌까 겁나고 그로 인해 원나이트 성문화가 이땅에 독의 큐피드 화살을 쏘아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특히 송년회 망년회 물결을 타고 성탄절까지 연말의 흥청대는 유흥 문화에 편승해 그들의 심성이 퇴폐화 될까 우려된다.
이땅에 꽃으로 피어나는 소중한 청춘들이여, 마음으로 사랑하지 아니한 채 꿀만을 따먹는 변칙의 섹스 행각은 사랑의 초원에 먼지 피우는 바람으로 살다가 두고 두고 이 땅에 인간성의 파멸(破滅)이라는 재앙(災殃)을 불러 일으키는 뿌리로 남아서 땅 속의 자양분이 고갈(枯渴)되는 날, 끝내 생명을 다하고 한 줌의 흙속에 처참히 묻힐 것을 필자는 경고하고자 한다.
구태여 이 영화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지울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글의 서두에서 소개했던 순결 서약 운동이 본국의 천주교계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며 신년에는 이 혼전 순결 운동이 다시 횃불처럼 훨훨 타올라 신선한 성교육의 발판으로 자리잡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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